내외부 경계 허물기; 시간의 층위 뒤섞기


몇 번의 붓질이 쌓여야 그것을 회화의 한 면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혹은 보이지 않는 회화의 겹을 가늠할 수 있을까. 회화는 하나의 장면 위에 또 다른 장면과 시간을 얹는 매체이다. 이따금 회화의 표면 아래 켜켜이 포개어진 물감층을 상상하자면, 마치 시간을 한 겹씩 쌓아 올린 퇴적물이 떠오르곤 한다.
회화의 보편적인 존재 방식은 지지체 위에 물감이나 다른 미디엄이 올라가는 것이기에, 가리어진 면을 복귀시키고 다시금 들여다보는 것은 회화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오주안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의 축적된 층을 마주하고 그 안에 퇴적된 시공간을 찾아내는 일은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오주안은 회화의 기본 조건을 전복시키며 회화가 지닌 면과 겹을 들춰낸다. 특히 지워지고 벗겨지는 마스킹 액의 특성을 이용해 회화 표면에 틈을 만든다. 그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한 화면을 구성한 다음 그 위에 마스킹 액으로 드로잉 후 다른 화면으로 덮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여러 면이 겹쳐 올라간 회화 표면에는 마스킹 액으로 그려낸 선이 남게 되고, 이 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내 투명한 색으로 사라지게 된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흔적이 되어버린 선을 찾기 위해 여러 각도로 빛을 비춰보고 손으로 더듬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을 통해, 그는 회화에 쌓여 올라간 한 겹의 껍질을 손의 감각으로 벗겨 내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이로써 완성된 이미지에는 흠집이 생기고 표면 아래의 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회화의 한 겹이 벗겨지면서 그 틈 사이로 과거의 시간이 발견된다. 이는 이전에 작가가 올렸던 물감과 휘둘렀던 붓의 움직임이 담긴, 지금보다 앞선 시간 속 사건이다. 마스킹 액이 뜯긴 흔적은 회화 표면에 남아 현재와 이전의 경계를 상징하지만, 그 주변을 이루고 있는 테두리의 양감은 마모되고 평평해져 간다.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던 틈의 윤곽은 점차 납작해지고 아래와 위를 구분 짓는 경계는 지워지게 된다. 그 대신 벗겨진 마스킹 액 찌꺼기만이 증거처럼 남는다. 이렇듯 틈을 경계 삼아 나뉘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은 서로 어긋나고 뒤섞인다.

이러한 방식은 틈 사이로 세상을 확대해서 바라보는 작가의 관심사와 연결된다. 특히 그는 현미경을 통해 보이는 유전자에 관한 관심을 이어간다. 그의 작업 방식은 유기체를 둘러싸고 있는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방식과 맞닿는데, 이는 안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존재들을 확대하고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처럼 작가는 미시세계를 관찰하는 것에 주목하며, 이번 전시 ≪Peeled Body≫에서 신체와 초상의 형상, 그 내부로 향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유기체부터 시작하여 점차 개인의 초상, 신체의 한 부분, 인간 군상으로 관찰의 대상을 넓혀간다. 그리고 자신이 그려낸 신체와 초상에 마치 상처를 내듯 마스킹 액의 자국을 남긴다. 이 흔적은 회화가 지니는 면과 면 사이의 층위를 흐트러뜨리며 실제 형상에서 점차 멀어지게 만든다.

눈으로 회화를 바라보면 우리는 가장 마지막 층위의 모습만을 볼 수밖에 없다. 회화의 겹겹을 따라 내려가게 되면 어떤 그림의 층과 장면을 만나게 될지, 혹은 이전에 그려진 보이지 않는 이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과연 회화의 속성을 거스르는 일일까. 회화 표면 아래에 깔린 추상적인 면을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회화에 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이들을 복원시킬 때, 그리고 감싸고 있는 회화의 면과 겹을 벗겨 내고 그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를 끄집어낼 때, 우리는 회화 표면 너머의 시공간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것은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고 차곡히 쌓였던 시간의 층위를 휘젓는 회화이다.

글 김재연
2024 《Peeled Body》 전시 서문